LA 이민 첫 3년, 달라진 삶의 방식들

3년 가까이 세상을 뒤흔들었던 바이러스는 마스크를 벗기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았음에도 희미한 옛날의 기억이 된 듯 하다. 

바이러스에 대해 아는 것이 없었던 2020년 4월 LA로 온 후 3년이 흘렀다. 30년 넘게 한국에서만 살았던 내가 처음 타국에서 삶을 시작하는 시점에 하필 이런 바이러스와 함께라니, 다시 생각해도 우울한 날들이 꽤 많았다. 모든 곳이 문을 닫고 마주하는 낯선 이들에게 더욱 더 예민하고 폐쇄적으로 변해버린 첫 3년의 삶은 우리를 좀 더 '생존형 이민자' 로 키워낸 것 같다. 

삶에 일상적으로 필요한 작은 것들을 남의 도움 또는 서비스를 받는 일을 최소화하면서도 하루하루가 굴러갈 수 있도록 스스로를 발전시킬 수 밖에 없었다. 2023년 4월, 이민 온 후 4번 째 생일을 맞이하며 적어보는 지난 이민 생활이 우리를 변화 시킨 것들을 기록해보았다. 

1/ 먹는 습관 - Eating Habits 

LA에 온 직후 캘리포니아 주는 마트를 제외한 외식 상업 공간의 모든 문을 일단 닫게 했다. 자연스레 우리 삶에서 외식은 멀어졌고 살아남기 위해서 집에서 식사를 직접 만들어 먹는 것은 선택이 아니라 의무가 되었다.

특히 의료 보험이 없던 우리에겐 '건강' 이 첫 번째 삶의 우선순위였다. 

건강을 잘 지키기 위해 우리는 '건강하게 먹는 삶'에 대해 생각했다. 고기 먹는 횟수를 줄이기 시작했고 채소와 해산물을 즐기기 시작했다. 다양한 채소가 넘쳐나는 캘리포니아의 환경은 우리에게 수많은 제철 채소들을 제공해 주었다. 사람이 다양한 만큼 음식 재료도 다양한 것이다. 제대로 만들어 먹는 것에 재미를 붙이기 시작하니 점점 더 많은 재료를 보게 되고 또 새로운 음식 문화와 알아가며 남편의 요리 사전은 점점 더 풍성해져 갔다.

그렇게 남편은 점점 '집밥 천재 백 선생' 이 되어갔다. 이제는 그의 요리를 먹을 때마다 행복해진다. 우리만의 2인분 레시피를 갖게 되고 먹을 때마다 즐거워한다. 건강한 식재료를 이용해서 만들어 먹는 기쁨이 삶에서 얼마나 중요한지 깨달았다.

바이러스 이후 다시 레스토랑들이 문을 열기 시작하면서 우리는 서울에서만큼은 아니지만 가끔 외식을 즐긴다. 다양한 문화가 섞인 사회인만큼 새로운 음식에 도전하고 맛을 느낄 기회가 많다는 것은 LA의 큰 장점 중 하나다. 종종 즐기는 외식에서 진짜 맛있고 새로운 경험을 하는 식당들 목록을 모으고 있는데 재미가 쏠쏠하다. 

외식을 통한 달고 짠 유혹들을 나는 아직도 사랑한다. 늦은 밤 맥도날드의 후렌치 후라이를 즐길 때도 있고 빵에는 환장하며 다양한 술도 즐긴다. 하지만 그것의 정도를 조절해서 즐기는 것이다. 우리 몸을 마치 커다란 바다라고 생각하면 어느 정도 오염물이 들어와도 스스로 정화시키는 작용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만약 매일 오염물을 몇 년씩 버리다 보면 결국 바다는 쓰레기통이 되어버리겠지. 하룻밤의 Guilty Pleasure를 즐겼다면 그 다음 날은 조금 가볍게 몸을 비워내는 시간을 주려고 노력한다. 무엇이든 정도가 중요한 것 같다.

먹는 것을 바꾸는 습관은 바로 나의 건강, 그리고 피부를 변화시켰다.

2/ 피부 관리 - Self Skin Care

나는 뷰티 강국 한국에서 이민 왔다. 하하. 서울에 살던 내내 여드름 하나만 나도 피부과에 가서 주사 뿅 맞는 것이 작은 돈으로 쉽게 가능하던 때가 있었다. 한국에 사는 이들아. 이 글을 읽는다면 그런 환경에 감사하라!

미국에 온 후 한국의 그러한 환경은 마치 꿈같은 일인 것이다. 이민 오고 1년 정도는 남편과 나 모두 직장을 구하지 못했다. 시간은 많고 집에 거울도 꽤 여러 개 있다 보니 언젠가부터 거울 속 내가 점점 더 나이 들어 보이기 시작하는 느낌이 들었다. 그것도 또 괜히 우울해지는 것이다. 

그런 감정을 떨치지 위해 내가 스스로 집에서 할 수 있는 관리가 무엇이 있을까 생각했다. 건강한 방법들을 먼저 찾다 보니 네츄럴 오일들과 가까워졌고 유튜브에서 다양한 홈 케어 방법들을 보며 내가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일까 생각했다. 그리고 한국에서 받아본 많은 피부과, 한의원, 관리샵의 경험들을 기억해 보려 노력했다. 나에게 제일 잘 맞는 게 뭐였더라? 내가 해보고 가장 만족했던 것이 무엇이 있더라? 이런 것들을 떠올려보며 스스로 관리 루틴과 필요에 따른 단계를 만들어가기 시작했다. 홈 케어는 정말 꾸준함이 답이라고 생각한다. 쉬는 날 아침이면 꾸준히 하고 있는 나의 홈 케어 루틴들을 정리해 보았다.

*1단계 - 보통의 관리

쌀뜨물 세수 

알로 베라 두껍게 바르고 10분

알로베라 살짝 닦아내고 네츄럴 오일 바르기

모델링 마스크 20분

세럼 + 크림 마무리

*2단계 - 조금 더 노력하는 관리

쌀뜨물 세수

세럼 + 크림 듬뿍 바르기

메르비 (갈바닉) 리프팅 케어 4분

모델링 마스크 20분

시트 마스크 15분

크림 + 네츄럴 오일 마무리

*3단계 - 하드 코어 관리

나는 가끔 모공을 조을 필요성을 느끼거나 트러블이 있던 자국들이 눈에 띄는 경우 MTS 관리를 해주곤 한다. 바로 Microneedling! 아주 작은 바늘이 가득한 롤러를 피부에 문질러서 새 살이 돋는 과정이 좀 더 빨라지도록 자극을 주는 케어라고 들었다. 새살이 빨리 돋도록 자극을 주고 사용하는 화장품의 더 깊은 흡수를 유도하는 것이다. 사실 가격적인 측면에서는 여느 검색창에 MTS를 입력해보기만 해도 합리적인 가격의 롤러들을 구매할 수 있다. 하지만 바늘이 온 얼굴을 찌르는 느낌을 견뎌야 한다는 것 때문에 하드코어 관리로 구분했다. 

나는 큰 욕심 없이 꾸준히 하자 주의로 관리 중이기에 0.25mm 짧고 가는 바늘로만 케어해서 이제는 그 정도 고통에는 좀 익숙해진듯하다. 그러나 익숙해져도 왜 계속 눈물이 흐르는 걸까... 아프긴 진짜 아프다. 하지만 이게 시간이 흐름에 따라 건강해져가는 피부를 보는 경험을 했더니 케어가 느슨해졌을 때 자연스레 이 케어가 또 하고 싶어지는 것이다. 나에게는 꽤 잘 맞는 피부 특효약이랄까?

나만의 루틴이 생기고 꾸준히 하다 보니 이제는 피부가 꽤 건강해진 것을 느낀다. 집에 있는 날은 관리 후 생각날 때마다 손을 씻고 수분 크림을 바른다. 그냥 이유 없이. 이민 후 좀 바이러스의 강림과 함께 우리 가족의 소비 습관은 확실히 줄어들었다. 덕분에 집에서 혼자 할 수 있을 다양한 재료들에 관심이 생겨 시작된 나의 작은 홈 케어 덕분에 요즘은 한국에 살 때 보다 오히려 속 당김이 확실히 덜해졌다. 전체적인 톤도 많이 개선이 된 듯하다. 꾸준히 좋은 천연 재료나 집에서 도전해볼만한 시도들을 계속해나갈 것 같다. 그러다 보면 할머니가 되어도 예쁜 할머니이지 않을까 기대해 보며!

사실 너무 바쁠 때는 그냥 샤워 후 시트 마스크 하나라도 얼굴에 얹어놓으려고 노력한다. 꾸준히 피부에게 하루에 하나씩은 좋은 일을 하자 이렇게 생각하면 쉽게 실행할 수 있을 것 같다.

스스로 노력해서 개선된 피부를 보게 되는 과정은 꽤 행복한 경험이다. 내가 나를 사랑하는 경험.

3/ 잠자는 것 - Sleeping

LA는 늘 사이렌 소리가 끊이지 않는 도시 중의 도시지만 신기하게 생활들이 빨리 마무리된다. 한국에 살 때는 밤 11시가 넘어도 각종 배달을 시켜 먹었고 새벽 1-2시에 잠들어 7시에 일어나 출근을 준비했다. 잠을 잘 잔다는 개념 자체를 가지기 힘들었던 것 같다. 서울을 떠나고 보니 그곳이 정말 '잠들지 않는 도시' 였구나 하는 것을 많은 순간 실감했다. 물론 LA의 어떤 지역들은 늦은 밤까지 불타오르기도 하지만, 도시 전반은 9시만 넘어도 조용하다. 자연스레 우리 부부의 삶도 10시 반, 늦어도 11시면 잠자리에 들게 되었다. 그리고 좀 더 아침을 즐기는 사람들이 되었다. 좀 더 해를 따라 살아가는 느낌이 든다. 해가 뜨면 일어나고 해가 지면 잠이 드는 아주 자연스러운 삶. 덕분에 우리는 다양한 '낮' 파티를 즐기기 시작했다. 꼭 밤이 되어야만 놀 수 있는 건 아니니까.

잘 먹는 것만큼 중요한 잘 자는 것이 충족이 되니 삶의 질이 달라졌다.

4/ 입는 것 - Clothing

한국에서 패션 디자이너로 일하면서 일 복 넘치는 20대, 30대를 보냈다. 일에 너무 치이다 보니 오히려 패션에 흥미를 잃었던 것 같다. 늘 트랜드를 쫓았고 재미없이 그저 잘 팔릴 것만 찾아 헤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런데 정작 스스로 패션을 즐기기 시작한 것은 오히려 일을 그만두고 LA 에 살기 시작하면서부터였다. 아는 이 하나 없는 오픈 마인드의 땅에 처음 살기 시작했다. 한국에서는 어쩌면 조금 특이한 줄 알았던 내가 이곳에서는 그저 평범한 아시아 꼬마인 것이다. 평범해지니 좀 더 재밌는 것들을 시도하고 싶어졌다. 

그래서 원 베드룸 작은 아파트의 옷장에 정리된 몇 개 안되는 옷 들이었지만 매일 그 안에서 다른 스타일을 만들어보자 생각했다. 구려도 이상해도 확신이 들지 않아도 일단 새롭게 매일 시도해 보는 것이다. 정말 이곳에서는 내가 어떻게 입던 아무도 신경 쓰지 않는다. 그것은 나에게 정말 큰 해방감을 안겨주었다. 

나는 이곳에 온 이후 한 번도 브라를 입은 적이 없다. 왜냐면 정말 아무도 신경쓰지 않고 편한 것이 최고인 곳이기에.

관종도 노브라도 평범한 사람도 다양성이라는 큰 틀 안에서 모두 다 평범해진다. 이것은 특히 내가 너무너무 사랑하는 LA의 모습 중 하나이다.

매일 다른 시도를 하다 보면 정말 다양한 색상과 핏에 도전하게 되고, 그 누구의 시선도 신경 쓰지 않고 다양한 패션을 즐기게 되면 그 경험들은 아이러니하게도 오히려 어떤 브랜드에 맹목적으로 매달리거나 갑자기 찾아오는 소비의 지름신으로부터 좀 더 자유로워질 수 있는 강력한 기술이 되어갔다. 즉, 내가 스타일링하면 다 예쁜 어떤 순간이 오더라는 것이다.

나는 정말 패션을 사랑한다. 그리고 LA 사람들은 Stranger의 패션이 재미있다면 칭찬을 아끼지 않는다. 언젠가부터 외출할 때마다 거의 매번 누군가의 긍정적인 코멘트를 듣는다. 칭찬은 들어도 들어도 기분이 좋다. 바이러스에 기죽어 살던 나는 덕분에 정말 많이 밝아졌고 옷 입는 재미는 내 삶의 큰 즐거움이 되었다. 마치 인형놀이 하듯이 내 마음대로 입는데 재미없을 수가 있겠는가.

한 번 사는 인생, 한 번 살 오늘 더 내 마음대로 재밌게 입어보니 진짜 패션은 인생의 아름다운 Life style 이구나 생각하게 된다. 내일은 어떻게 다르게 입어볼까? 더 재밌게 입어야지.

5/ 말하는 것 - Language

언어에 있어서는 정말 할 말이 많다.

사실 LA는 영어를 말하지 않고 살아도 생존할 수 있는 인프라가 아주 잘 구축이 되어있다. 그런 환경은 처음 외국 생활을 하는 나를 배려해 남편의 선택에 큰 영향을 준 이유이기도 하다. 하지만 나는 새로운 언어를 배우는 것에 늘 열려있고 또 이토록 배우기 좋은 곳에 와있다면 왜 안해?! 라고 생각했다. 얼마나 이 꿈같은 도시에 더 살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사는 동안 모든 LA 장점들을 쪽쪽 빨아먹고 살아야지 생각했다. 그리고 하루하루의 언어 습관들을 차츰차츰 영어로 바꿔나가기 시작했다.

바이러스가 시작되고 만날 사람은 없었고 시간이 많았던 나는 먼저 발음과 강세 공부에 빠졌다. 완벽한 문장을 만드는 것도 중요하지만 정확하게 의사를 전달하기 위해서는 간단하더라도 사용하는 모든 영어를 제대로 발음하는 것을 매일의 습관에서 실행했다. 물론 영어도 한국어처럼 나라, 지역, 출신에 따라 모두 발음이 다르고 틀려도 상관없다는 것을 먼저 배웠다. 그것을 배우니 틀리는 것이 하나도 겁나지 않는 것이다. 그런데 틀리는 것과 별개로 그 언어를 깊이 알아가는 느낌은 정말 재미있었다. 한국인에게 영어가 어려운 것은 한글처럼 모든 발음이 룰대로 적용되지 않아서 암기해야 하는 부분이 많고 워낙 파도처럼 Flow 를 많이 타는 언어라 한 글자씩 끊어지는 우리나라 말과는 정말 다른 것이었다. 그런데 계속 눈에 보이는 것들을 제대로 읽고 발음하는 연습을 하니 어느 순간부터 새롭게 들어오는 단어지만 이 발음이 적용되는 큰 규칙들을 혀가 기억하게 된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또 Flow를 이해하게 되니 발음이 조금 서툴러도 전체적인 문장과 상황 등에 의해서 사람들이 이해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즉 어느 정도 수준만 올라가면 개떡같이 말해도 찰떡같이 알아듣는 순간이 올 것이라는 이야기.

나는 표준 미국 영어(General American English) 를 기준으로 공부했고, 공부 중 나를 특히 매혹시킨 것은 '모음' 발음 구조들이었다. 한국에는 아예 없는 뭐랄까.. 좀 과장된 발음 체계들이라 나의 뇌에 한국어 발음 체계 -> 영어 말하기로 번역하여 입으로 나오는 과정보다 영어를 영어대로 주입시켜서 언제라도 특정 단어를 대화 중 사용하게 되면 배운 대로 발음하며 뇌에 새기려 노력했다. 처음 알게된 발음은 혀에 기억을 시키려고 10번 20번 반복해서 발음했다. 남편은 나의 요청으로 내가 말하는 단어 중 어색한 부분이 있을 때마다 정정해 주었다. 이 얼마나 감사한 선생님인가! 대화할 때 사용한 단어는 이미 뇌에 박혀있는 것이고 이것을 제대로 발음하는 스피커까지 장착이 된다는 나는 완전히 그 표현을 먹었다고 할 수 있다. 나는 그 먹어가는 과정이 재미있었다.

두 번 째로 내가 사용하는 모든 기기와 컨텐츠들의 기본 언어를 영어로 바꿨다. 아이폰은 물론 드라마나 영화를 볼 때 자막도 다 영어로 바꿨다. 매력적으로 들리는 목소리나 발음 흉내 내는  것을 재밌어하는 나는 들리는 것들은 들리는 대로 Shadow speaking 했다. 매일 공부해야지 이런 생각보다 재밌게 볼 수 있는 컨텐츠들을 영어로 바꾸다 보니 새로운 문화와 단어, 대화들에 자연스럽게 젖어드는 것이다. 모든 것을 다 이해하려 들지도 않았다. 이해하지 못한 것은 흘려보냈다. 그저 재밌는 것들을 따라가기만 했다. 그러다 보니 어느새 무서운 것 없이 LA에서 일도 시작하게 되고 우리만의 즐기는 활동의 영역들이 조금씩 넓어져갔다.

LA가 전 세계의 entertainment 와 film 산업의 중심지라는 것은 누구나 인정할 것이다. 그만큼 그쪽 industry에는 잘 찾기만 하면 즐길 수 있는 행사들이 정말 많다. 코비드가 조금씩 줄어들기 시작하고 다시 일상으로 돌아오는 느낌이 들기 시작할 때도 우리는 여전히 Job이 없었고 시간은 많았다. 그래서 우리는 재밌는 행사들을 열심히 찾아다녔다. 토크쇼 audience부터 stand-up 코미디, 오스카 뒤풀이 방송 현장, 프리미어 행사들, 수많은 갤러리 오프닝 파티 등, 내가 살면서 모르고 살았던 세상의 BTS(Behind The Scene)들을 보고 또 행사에 참여하면서 언어뿐만 아니라 문화를 경험하기 시작한 것이다. 내가 사는 곳의 문화가 재미있다면 언어는 자연스레 익숙해지지 않을까 하는 생각한다. 

Academy Awards 뒷풀이 방송 관객 + Drew Barrymore 쇼 녹화 관객

세 번째로 City college 수업 들을 듣기 시작했다. 한 번도 유학 생활을 하지 않았던 나에게 현지의 캠퍼스에서 수업을 듣는 것은 여전히 가슴 설레는 경험이다. 들을 수 있는 수업 또한 정말 다양했고 수업료도 아주 합리적이었다. 처음 들었던 수업은 영어가 제2 외국어인 이민자들을 위한 발음과 억양 수업이었다. 뒤돌아보니 이 수업은 나의 영어에 대한 접근을 완전히 바꿔놓은 소중한 수업이었다. 처음에는 수업료가 저렴해서 표준 미국 영어를 기준으로 한 발음을 함께 따라 하는 정도이려나 생각했다. 그런데 이상하게 30분 이상 몸을 풀고 호흡을 배우고 혀 운동만 하는 것이다. 수업 중 눈을 감고 혀를 이리저리 돌리고 돌리고 명상을 하다가 갑자기 혼자 빵 터지기도 했다. 내가 지금 무엇을 하는 건가 싶었다. 그런데 이 활동은 확실히 수업에 긴장한 나를 풀어주었고 한국어 할 때와 혀 자체를 다르게 사용하는 것이구나를 깨닫게 했다. 선생님은 연기를 전공하신 분이셔서 연극에 들어가기 전 배우들이 호흡으로 긴장을 푸는 것을 알려주셨던 것이다. 수업은 좋아하는 책의 구절을 선택해서 스크립트를 직접 적어보고 필요하다면 엑센트와 기호 표기를 정리한 후, 정확한 발음으로 읽어보는 수업이었다. 내가 읽은 것을 녹음하고 들어보고 또 선생님에게 전달하면 교정하여 읽으면 좋을 부분을 또 녹음해서 전달해 주셨다. 내가 내 발음을 녹음해서 다시 들어보는 것도 공부가 되었고 (조금 쑥스럽기는 했다) 또 선생님을 통해 내 발음과 억양을 섬세하게 다듬어주어가는 것도 정말 큰 공부가 되는 것이다. Beginner 수업이 너무 좋아서 심화 수업까지 등록했다. 다음 프로젝트는 영화나 드라마 속 특정 캐릭터의 일부 대사를 선택해서 그 스크립트를 직접 적고 동일하게 필요한 노트를 한 후, 그 배우의 감정선까지 넣어서 제대로 따라해보는 것이었다. 내가 선택한 스크립트는 LA 하면 빼놓을 수 없는 '분노의 질주' 중 빈 디젤(Dom) 의 대사 중 일부였다. 그 짧은 스크립트를 그대로 따라 해보고 싶어서 얼마나 많이 돌려보기를 했는지 모르겠다.

배우가 하는 캐릭터에 몰입되어 있는 그 상황에 나를 넣어서 따라 하려고 노력하다 보니 확실히 영어의 Flow 와 훨씬 친해진 기분이다. 왠지 강한 여자가 된 것 같은 묘한 쾌감도 좀 들었다. 하하.

그리고 함께 수업을 듣는 모든 사람들의 출신이 달라 모두 다른 억양으로 영어를 말하는 것이 정말 재미있었다. 모두 영어로 말하고 있지만 각자 출신 국가의 억양이 녹아든 각자의 영어를 사용하며 안되는 발음을 시도하다 깔깔대고 수업을 듣는 경험은 나도 나만의 영어를 해도 된다는 자신감을 엄청나게 키워주었다. 이민자가 모여서 만든 나라이지 않은가?   

첫 수업을 들으며 좋은 기억 덕분에 이후에도 Creative writing, Painting, Knitting 등 재밌는 것들을 계속 배워가고 있다. 덕분에 실로 다양한 용어들을 배우고 나도 모르게 내가 그 단어들을 쓰고 있다. 새로운 것을 배우는 것은 언제나 즐거우니까!

6/ 정신 건강 - Mental Care

나는 정말 긍정적인 사람이라고 자부하며 살았다. 그러나 아무리 긍정적인 나에게도 바이러스와 함께 시작된 이민 생활은 꽤 많은 시간 우울감, 후회, 내 선택에 대한 불확실한 마음, 미래에 대한 막막함, 두려움, 불안감, 스스로 계속 뒤처지고 있는 것 같은 알 수 없는 자신감 하락 등. 수많은 역경의 감정들을 안겨주었다. 10년 넘게 한국에서 열심히 고용되어 일하는 삶을 살아왔는데 이곳에 왔더니 아무도 반기지 않고, 집값은 어이없게 비싸고, 고용 시장은 얼어붙었고 나라는 사람이 할 수 있는 것이 있기는 했나, 도대체 왜 왔니 하는 미쳐버릴 듯한 좌절감이 계속 밀려오는 것이다. 

시간이 많으니 생각이 더 많아지고, 생각은 잡념이 되어 나를 잡아먹어가던 때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사람은 만나기 힘들었지만 날씨와 햇살이 너무 좋은 곳에 살다 보니 아름다운 씬은 매일 만나게 되는 것이다. 자연스레 이 아름다움들을 마주할 때마다 그리고 싶다 생각했고 조금씩 소소한 기쁨을 느꼈던 순간들을 그려나갔다. 나는 특히 다양한 색상으로 캔버스를 가득 채워나갈 때 가장 큰 즐거움을 느꼈다. 그 합들이 아름다운 결과를 완성해낼 때 뭉클한 성취감이 올라왔다. 색. 이 색이 마음을 치유하기 시작하는 것이다. 

아름다운 색깔과 따뜻한 햇살이 가득한 도시에서 나만의 미학을 발견하고 표현해 내는 과정은 꽤나 중독적인 치유의 감정이다. 계속하고 싶고, 그러다 보니 습관적으로 내 삶에서 행해지고 있는. 그리고 나이가 들어 한 가지 일에 이토록 오랫동안 집중할 수 있는 나의 새로운 영역을 발견한 것 자체로 나는 행복했다. 

나에게는 정신의 약이었고 이제는 좀 더 매일 만나는 친구 같은 이 그림 그리기는 나중에 할머니가 되어서도 계속하고 있을 것 같은 느낌이 든다.

7/ 커피 - Coffee

전 세계 수많은 이들에게 어쩌면 평생 끊을 수 없는 마약과도 같은 그것. 우리는 커피를 너무너무 사랑한다. 한국에서 정말 많은 사랑하는 카페들을 찾아다녔다. 남편이 마포에 살 때 프릳츠가 집 근처에 들어왔고, 그때부터 자연스레 우리의 커피 사랑이 시작된 것 같다. 커피를 그냥 식사 후 한잔하는 음료로 대하는 것이 아니라 진짜 맛있는 커피를 갈구하게 되는 것이다. 커피 수업을 듣고 여행을 다니며 전국의 맛있는 커피를 경험했다. 한국은 맛있는 커피를 제공하는 아름다운 카페가 너무 많다. 정말 너무 많았다. 진짜 쉽게 맛있는 커피를 마실 수 있는 환경에 완전 spoil 되서 살다가 처음 이민을 왔을 때 나는 짧은 시댁의 뉴저지 생활에도 질 좋은 커피가 끊어짐에 힘겨워했다.

LA 오고 나서도 사실 서울처럼 쉽게 걸어서 바로 앞에 카페가 있는 그런 환경은 없었다. 바이러스 때문에 실내 취식이 다 불가능했기에, 커피 한 잔 하려면 옷 갈아입고 자동차 시동걸고 카페 찾아가서 일회용 투고 잔에 받아서만 마실 수 있었다. 제대로 된 커피는 나오자 마자 제대로 된 잔에 제대로된 온도로 마실 때 가장 좋다는 것이 혀에 기억된 우리는 결국 에스프레소 머신을 사서 직접 만들어서 마시자로 발전했다. 약간의 투자가 필요했지만 좋은 기계가 생기니 메일 원할 때 바로 에스프레소를 얻을 수 있었다. 그러나 우유가 들어간 커피를 특히 사랑하는 우리에게 이 '우유' 를 제대로 다루는 것이 생각보다 쉽지 않은 것이다. 원두 자체도 중요하지만 스팀 우유의 텍스처와 온도에 따라 완성된 라떼의 맛이 크게 좌우되었다. 그때부터 Paul 은 꾸준히 좋은 스팀 우유를 만들어내는 것을 공부했다. 유튜브를 보고 물에 색소를 타고 계속 연습하고 또 우유로 시도하고 실패하고를 꽤 오래 반복했다. 그러더니 어느 날, 그의 손이 감을 잡기 시작했다!!!! 실로 노력은 그를 배신하지 않았다. 더불어 우리는 점점 더 다양한 맛의 질 좋은 원두들을 발견해나갔다. 

진짜 맛있는 커피를 원할 때 바로 마실 수 있는 환경이 셋업되니 정말 내가 더 무엇이 필요한가 싶을 정도로 삶의 만족감이 높아졌다. 바리스타 Paul 감사합니다. 진심으로 진짜로 정말로.

8/ 개인 이발사 - Private Barber

남편이 커피의 요리와 커피의 영역에서 손기술을 키워나갔다면 이 기술은 나의 영역이라 말할 수 있다. 그것도 매달 해내고 있는, 아주 자랑스러운! 하하. 

이민 오고 대부분 상업 공간이 문을 닫아서 할 수 없이 남편의 헤어스타일은 점점 더 예술인이 되어갔다. 거의 단발 수준이 되어갈 즈음, (물론 그 스타일도 나쁘지 않았지만) 그냥 내가 도전해 볼까? 하고 문득 생각이 든 것이다. 

일단 가장 쉽게 만날 수 있는 유튜브의 다양한 선생님들을 접했다. 남편에게 필요한 정도의 바리깡 기술 정도는 왠지 해낼 수 있을 것 같은 묘한 자신감이 들어 Target에서 20불짜리 바리깡을 사버렸다. 그리고 남편은 기술은 부족하지만 자신감은 있는 초보 이발사에게 생각보다 긴장하지 않고 쿨하게 자신을 내어주었다. 처음에는 다양한 pot hole들을 많이 만들었었는데 이제는 꽤 자연스러운 그라데이션을 만들 수 있게 되었다. 작업 시간도 단축되어 요즘 남편은 이발을 받으시면 20불을 Venmo 한다. 하하 나의 소중한 side money. 나중에 다시 한국에 살게 되면 시골에 살고 싶은데 그럴 때 혹시 내 이발 기술이 필요한 어르신들이 계시면 봉사하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단 헤어 스타일에 아주 open mind인 어르신들에게만 제공될 수 있겠지만.


3년이라는 짧다면 짧고 길다면 매우 긴 이 시간들을 통해 확실히 나는 새로운 캐릭터가 되었다고 생각한다. 오랜만에 만난 나의 친한 한국 친구들이 아주 미국 물이 제대로 들었다며 놀렸다. 그도 그럴 것이 첫눈의 스타일이 변했고, 표정도 변했고 말투는 더할 나위 없이 변해버렸으니, 이민 오기 전의 나는 때때로 정말 다른 사람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하지만 그게 싫지 않다. 모든 것은 경험에 의해 자연스럽게 내 안에 반영이 되고 또 새로운 나를 발견하는 과정에서 나는 더 나 다운 사람이 되어간다고 생각한다. 채지혜가 자연스럽게 Jina Chae 가 되어가는 과정. 한 인간이 삶의 방식을 선택해나가면서 계속 스스로의 캐릭터를 내적, 외적으로 발전시켜나가는 것이 인생의 사이클이 아닐까 생각하며 오늘 하루, 지금 이 순간을 더 감사히 살아나가보려 한다.

하루하루에 웃는 일이 많은 오늘이 되었다면 그동안의 첫 이민 생활 우리 가족 함께 잘 해내어왔다고 생각이 든다. 3년간 열심히 잘 살았다. 앞으로도 재미있게 잘 지내보자.

Happy Birthday, Jin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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